* 일단 나쁜 짓.....
* 당시에는 음주운전이 지금처럼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었다.
* 젊은 시절의 치기로 인한 잘못을 저지른 기억.
13대 국회(1988년~1992년) 당시라고 기억한다.
이때까지 만해도 차량에 경광등을 부착하는 일은, 경찰 관서의 허가 없이는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만약 개인이 불법으로 차량에 경광등을 부착하다 걸리면 제법 엄한 처벌을 받았었다.
지금은 아는 사람조차 그다지 많지 않지만, 당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 차 뒤에는 제법 길쭉한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테나는 차에 카폰이 설치되어 있다는 걸 의미했다.
참고로 이후 휴대전화(흔히 벽돌폰이라고 이야기하며, 크기로 보자면 벽돌보다 조금 더 길쭉했다.)가 출시되면서 카폰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아무튼 당시 우리끼리 하는 회식 장소가 대부분 태종대 순환도로(절영로) 중간쯤 있는 75 광장이었고, 여름철 밤이면 그곳에는 항상 술판이 벌어졌었다.
광장에 주차해둔 트럭에서 파는 어묵과 소주를 사 와서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거기서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 치하의 현실에 분노했고, 영감과 당의 미래를 고민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군사정권 치하의 현실에 분노하고 또 암담한 내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그 일이 지칠 즈음이면 돗자리를 걷고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때 항상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바로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관들이고, 75 광장에서 매일 밤 부산시민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경찰관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리운전 업체는커녕 대리운전이란 단어조차 생경한 시절이었으니.
“형님. 경광등!”
“아! 깜빡 까먹을 뻔했네.”
다들 알겠지만 영도란 동네는 섬이다.
그래서 지금도 절영로 중리 쪽과 지금은 흰여울마을로 유명한 영선동 내리막길 끝쯤만 지키면, 범죄자들이 어디 도망갈 구석도 없다.
영도를 빠져나가거나 영도로 들어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도심과 영도를 잇는 도로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 이 다리 두 군데뿐이다.
그러니 영도대교와 부산대교에 경찰차를 세워두고 검문만 제대로 하면, 그 어떤 범죄자도 도망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담이 큰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목숨 걸고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리진 않을 것 아닌가?
술은 마셨겠다, 앞에서 음주단속은 하고 있겠다.
그럼 어쩌겠는가?
대가리 처박고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부터 하고 면허증 밑에 만 원짜리 석 장을 접어서 면허증을 건네든지, 아니면 스티커를 받고 과태료를 납부 하는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
그만큼 당시 음주운전에 관해서는 관대(?)했었다.
그런데 우린 면허증 밑에 돈을 끼워 건네며 사과하는 대신, 라디에이터 그릴 안 양쪽에 부착된 빨간색 경광등을 켜고는 단속 경찰관 쪽으로 다가가 차 유리를 살짝 내리고서는 ‘어이~ 작전 중이야!’ 이 한마디를 던지면 ‘충성!’하는 경례를 받으면서 거길 통과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방법이 통했다.
물론 경찰관들이 차량번호판을 확인했더라면 망신스러운 일이지만, 경광등을 번쩍거리면 전면 번호판의 숫자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경광등이 부착된 차량이니 기관 소속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괜히 단속한답시고 건드렸다가 나중에 정강이 까이는 일이 생길까 봐 그게 귀찮아서 피할 뿐이다.
사실 우리도 단속에 걸리고 영감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가면 영감한테 열나게 깨지겠지만, 만약 우리가 아닌 진짜 기관원이라면 그 친구들은 체면이나 자존심 그딴 것도 없으니, 아예 경찰서를 뒤집어 놓는 일이 벌어지니까.
아무튼 그때는 그랬었다.
교통 경찰관들은 그 지역에 굴러다니는 안기부, 언론사, 법원이나 검찰 고위직, 국회의원 차량의 번호판을 외우는 것이 통과의례였던 시절이었다.
괜히 건드려봐야 똥물만 뒤집어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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