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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삶의 이야기

전·장·연 지하철 탑승 시위 유감(feat 박경석)

by 나정치 2023. 3. 23.

전국장애인연대(이하 ··)에서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한다고 한다.

 

https://v.daum.net/v/20230323103111330

 

전장연, 2개월 만에 지하철 탑승 시위 재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2개월 만에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했습니다. 전장연 활동가 약 10명은 오늘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상행선 승강장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오전 8시 50분쯤

v.daum.net

장애인에 관한 내 입장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장애인에 관해 호불호(好不好)는 전혀 없다.

 

중학교에 재학할 당시에는 (내가 착한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목발을 짚은 손목에 가방을 끼고 가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랬을 뿐이다.)같은 반 소아마비를 앓는 친구 가방을 들고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기도 했고, 대학방송국에서 활동하던 중 봉사활동 동아리 취재에 나섰다가 해운대에 있는(있었던) 정신지체 장애인 보호 시설에 동행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학 재학기간 중 몇 차례 봉사(라고 쓰고 놀러 간거다.)한다는 핑계로 그곳을 찾기도 했었다.

 

대충 이 정도면 내가 장애인과 관련해서 특별한 편견이 없다는 사실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에 관한 첫 기억은 끔찍했다.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기간까지 지냈던 내 고향이 경북 선산군(지금은 구미시) 중에도 가장 외곽의 시골마을이었는데, 그때 걸핏하면 손에 갈고리를 매단 장애인(그들은 6.25 남북전쟁 당시 부상한 상이용사라고 말했었다.)이 마을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렇게 그들이 갈고리 손을 휘두르면서 행패를 부리면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뒤주에서 쌀이나 보리를 퍼주고 그들을 돌려보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하지 않았던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에게, 그들은 공포였고 그 덕분에 장애인에 대한 기억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에 관한 관심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이전에도 상이군경을 대상으로 한 국가보훈사업이 존재했지만, 그 사업은 오롯이 6.25 남북전쟁 당시 부상을 당한 군경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고 사업이었으니, 그걸 두고 장애인 복지정책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장애인 복지에 관한 정책의 시발점은 1980년대 후반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89년에 장애인복지법이 전면 개정되고 이듬해인 90년에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는 등, 국가가 본격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2000년대 들어 장애인 정책은 획기적으로 발전 되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에게도 전파되었고, 덕분에 선거 때마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은 질세라 장애인 보호시설이나 장애인 단체를 방문하는 일이 필수 요건처럼 자리잡았다.

 

 

 

이젠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에 장애인 전용 주차장이 있고, 아무리 차를 주차할 장소가 없어도 장애인 전용 주차장은 항상 비어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뿐인가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장애인 이동을 위해 장애인 전용 택시(부산은 '두리발'이다.)가 있고, 버스는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탑승할 수 있도록 저층 지상버스가 등장했다.(사실 나는 버스에 장애인이 탑승한 것을 한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

 

지하철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 전·장·연이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면서 시위하는 지하철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는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트를 설치해서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그러니 전·장·연에서 고집하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이뿐인가?

 

부산시내 곳곳에 설치된 횡단보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신호등 기둥에 음성 안내를 받을 수 있는 녹음장치를 설치해두었으며, 보도에는 비장애인조차 잘 다니지 않는 이면 도로(차도 보도가 구분된 지역)에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 보도블록을 설치해두고 있다. 물론 형식적인 부분도 이따금 눈에 띄기도 하고,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얼마 전 내 sns 계정에 사진을 찍어 게시하기도 했었다.)

 

장애인에게 국가가 투자하는 부분은 이뿐 아니다.

 

역대 정권을 거쳐오면서 장애인과 관련한 정책은 지속해서 발전해 왔고, 그것은 최악의 정권 중 하나로 꼽히는 이명박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https://www.mohw.go.kr/react/policy/index.jsp?PAR_MENU_ID=06&MENU_ID=063701 <--- 장애인 복지관련 정책

 

 

 

전해 오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호의가 반복되면, 그걸 권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저런 꼴을 당한 적 있다.

 

2013년 4월경 나는 정치판 백수생활을 청산했고, 이후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반쯤 미친놈의 모습으로 6개월 정도 지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당장 아쉬운 것이 담뱃값이었다.

 

정치판 백수노릇을 하고 살 당시에는, 돈이 남아돌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돈이 없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아쉬운 소리하기 싫어서 그랬지, 손을 내밀면 빌려주거나 도와줄 사람은 분명히 있었으니까.

 

아무튼 아내에게 담뱃값 달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아내 몰래(결국 들켜서 대판 싸우기도 했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남산동 침례병원 입구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모아둔 돈이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붕어빵 장사가 최선이라고 판단했었다.)

 

아무튼 진짜 남는 건 없었지만, 장사는 지독하게도 잘 됐다.

 

심지어 남산 지하철열 지하도를 건너(중앙대로) 건너편 B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가, 다른 장소로 리어카를 옮겼을 정도였으니까.

 

아침 10시에 장사를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붕어빵을 구워 팔았는데, 담배 피울 시간조차 없었다.

 

심지어 침례병원 수술실 스태프들과 인근 약국 등에서는, 아예 내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예약주문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그때 만났던 노인이 한 사람 있었다.

 

"아재, 거기 버리려고 놔둔 빵 나한테 주면 안 되겠소?"

"어르신 이거 드시면 배탈납니다.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라서 버려야 하거든요."

 

장사를 마치고 불을 붙이고 처음 밀가루를 부었던 붕어빵(다 익지 않거나 타거나 한)을 모아두었던 봉투를 챙기자, 그때 지나던 노인이 그걸 달라고 부탁했다.

 

먹지도 못하는 것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가스 불을 끄고 정리까지 끝냈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르신, 내일 오세요.  내일을 깨끗한 거는 따로 챙겨두겠습니다."

 

그렇게 노인을 보냈다.

 

어차피 붕어빵을 굽다가 보면 불조절에 실패해서 눌어붙어 배가 터지는 붕어빵이 이따금 나온다.

 

그리고 이튿날 밤부터 그 노인은 매일 출석 도장을 찍듯 내게서 배가 터진 붕어빵을 얻어 갔고, 이따금 양이 부족하다 싶은 날은 멀쩡한 붕어빵 몇 개를 더 챙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노인이 나를 찾아오는 시간이 밤에서 오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붕어빵을 가져갈 거면, 이왕이면 따뜻할 때 가져가겠다고 아침에 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앞 부분에서 이야기했지만, 붕어빵 장사가 미칠 정도로 잘 되었다.

 

그랬기에 10시에 불을 켜면 그때부터 손님이 줄을 서기 시작하는데, 추레한 차림의 노인이 옆에서 지키고 있으니 불편해 하는 것이다.

 

결국 며칠은 노인을 빨리 보내기 위해 성한 붕어빵 다섯 마리를 봉투에 넣어 건넸고, 그게 며칠 지속되었다.

 

 

 

"이건 못파는 거잖아? 이딴 걸 먹으라고 줘?"

" 예?"

 

그러다가 결국 일은 터졌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날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고,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가 보니 자연 배터진 붕어빵이 줄줄이 나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배터진 붕어빵을 봉투에 담아 노인에게 건넸는데, 그걸 본 노인이 길길이 뛰면서 황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두어 달 전 만해도 먹을 수 없던 붕어빵을 달라고 보채던 영감이, 배가 터진 붕어빵이라고 내게 타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나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고, 분노를 터트렸다.

 

매일 마수 하기도 전에 찾아와 공짜 붕어빵을 얻어가더니 이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배터진 붕어빵이라고 투정하니 말이다.(사실 밥을 시켜먹을 여유도 없었던 시기였고 밥을 먹으러 갈 시간도 없어, 점심은 항상 배터진 붕어빵으로 대신했었다.)

 

나이든 노인을 팰 수도 없고 또 주변에 구경하는 분도 많았기에, 112에 신고하여 경찰 출동을 요청하는 것으로 그날 일은 마무리 되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날 이후 지나가는 개에게 붕어빵을 조금씩 떼서 던져주는 일은 있었어도, 그 영감을 위해서는 덜익은 붕어빵조차 남겨두질 않았다. 

 

 

   

내 눈에는, 현재 지하철 시위를 주도하는 전·장·연 시위 또한 그런 시각으로 보여진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지 저들의 불만을 무마할 방법이 있었더라면, 여야 불문하고 나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좋아하는 국회의원 누군가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요즘 튀기 좋아하는 국회의원 애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만약 저들의 요구를 일부라도 들어줄 방법을 찾아낸다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물론 차기 총선에서 전·장·연 이름으로  지지성명을 내걸어주기까지 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 침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안이 없다는 뜻이자 저들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라는 것이다.

 

하물며 저들은 이미 저들 스스로 정당성을 무너뜨려버렸다.

 

시위를 한다면 정부청사 그러니까 주무 관청인 보건복지부나 국회 그것도 아니라면 서울시청 앞에서 관료들의 출근을 저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저들이 볼모로 잡은 대상은 출근길 시민들이다.

 

물론 그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 중에는 저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개중에는 저들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사는 시민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이야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격이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접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