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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삶의 이야기

사람은 제각각 설 자리가 따로 있다.

by 나정치 2023. 11. 17.

‘No kids zone’ ‘No senior zone’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걸 두고 세대 갈등이라고 할 수도 없고.

 

처음 No Kids Zone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이야기 하나.

 

결혼 전 집사람이, 하단 59번 종점 부근에서 책 대여점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거의 매일 저녁이 되면 연산동에서 하단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셔터 내리는 일을 도왔고, 돌아올 때는 시내 직행버스로 수영 로터리로 와서 그곳에서 택시로 연산동 집까지 오는 일상이었다. (어차피 평생을 셔터맨 노릇조차 해주지 못한 남편이지만, 만일 책 대여점이 아니라 약국이었더라면 진짜 셔터맨 노릇을 하면서 살뻔했다.)

 

아무튼 연산동에서 하단으로 향하는 지하철이 서대신역쯤 되면 한 칸이 텅 비다시피 한다. (요즘은 노선이 연장되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지하철이 서대신역을 지나자, 내가 탄 칸에는 대여섯의 승객만 남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지하철 바닥을 뛰어다니던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신발을 신은 채 의자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한 거다.

 

! 뛰어다니지 말고 앉아!”

 

하긴 그 나이의 아이가 저렇게 점잖게 얘기한다고, 말을 듣기나 하겠는가?

 

그 정도로 이야기하면 당연히 아이 엄마가 아이를 제지할 거로 생각했지만, 아이 엄마는 내 말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마냥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가 뛰어노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흙탕물 묻은 신발 자국이 지하철 의자에 찍히는 걸 보면서도 말이다.

 

! 인마!”

~”

 

그 꼬마가 결국 나한테까지 달려와 내 허벅지를 밟는 동시에 나를 덮쳤고, 내 바지에 그놈 신발의 흙탕물 자국이 남은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왜 그래요?”

뭐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면, 엄마란 사람이 저렇게 뛰어다니지 못하게 해야지요. 의자 신발 자국,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내 바지는요?”

그깟 바지 세탁비 물어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의자에 묻은 흙탕물은요?”

청소하는 아줌마가 청소할 텐데, 아저씨가 왜요? 아저씨가 지하철 사장이에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악담을 내뱉었다.

 

만일 그때라도 아이 엄마가 사과했더라면, 그렇게 심한 악담까진 내뱉지 않았을 것인데.

 

그따위로 애 키워봐야, 박한상 같은 놈 됩니다!”

 

내 고함에 양쪽 옆 칸의 승객들도 우르르 몰려와 우리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다가, 엉망이 된 지하철 의자와 아이 엄마를 번갈아 보며, ‘박한상 같은 놈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결국 주변 승객의 눈총에, 그 아이 엄마가 당리역에서 허겁지겁 내리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야기 둘.

 

정치를 하려면 지역에 천착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집사람 도움을 받아 초등학생 대상 방과후학교를 운영했었다.

 

방과후학교 자체가 무조건 적자 나는 일이라, 시작하기 전부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굶지 않으려고 집사람은 방과후학교가 끝나면, 그곳에서 초등·중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했다.

 

아이들이 모여, 숲을 이루는 세상

 

방과후학교 아이들의 숲시작부터 망해서 문을 닫는 날까지, 저 생각은(신념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변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 부모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할 부모도 많을 것이다.

 

아이들의 숲에 입학하게 되면, 피아노·미술·태권도장을 제외한 학원 금지 귀가 시 부모가 직접 데리러 와야 함 상황에 따라 아이에게 체벌할 수 있으니, 체벌에 동의, <--- 이게 입학 전제조건이었다.

 

결론적으로 금전적 곤란함으로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제법 많은 학부모에게 찬사받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문 닫은 지 10년도 더 지났음에도, 아직 당시 학부모들과 편하게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내가 글을 쓰느라 작업실서 꿈쩍 않고 지내는 게 걱정되어, 강제로 외출시키는 학부모도 있다.)

 

사실 이 방과후학교 아이들의 숲때문에, 로또복권 당첨을 꿈꾸기도 했었다.

 

만일 내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었더라면, 진짜 끝내주게 방과후학교 아이들의 숲문을 다시 열고, 또다시 아이들과 매일 목청 높여 싸우고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 대학에 재학 중인 놈들에게, 강제 자원봉사를 강요했을 것이다.)

 

 

이야기 셋

 

선배님. 사무실에 한 번 들러주시지요.”

 

선배님. 노트북 가지고 와서, 사무실서 작업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사랑(nasarang) . 그냥 얼굴만 몇 번 비춰주는 건 할 수 있잖습니까?”

 

지금이야 자칭 친문’ ‘친명이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처지라 X값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저런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나사랑(nasarang) 이재호라는 이름값보다는, 김정길의 따까리(또는 새끼)라는 이름값이 훨씬 더 무거웠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부탁(또는 제안)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거절한 데 대한 오해는 없길 기대한다.)

 

그 제안(또는 부탁)을 거절한 이유는 간단하다.

 

50이 넘은 나이의 그리고 잘 생기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선거사무소에 죽치고 있어 봐야, 선거에 출마한 후보에게 아무런 도움 될 일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란 판단 때문이다.

 

 

선거(또는 선거사무소)에는 피 끓는 젊은 청년이 필요하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란 말이 있다.

 

예전 노무현 대통령님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셨을 당시 노사모 회원들의 자발적인 선거 참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선거 패러다임을 선사했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의 선거유세에서, 당원·지지자의 막춤은 유권자들에게 생경하면서도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호재로 작용했었다.

 

그런데 진짜 제대로 막춤의 과실을 따 먹은 정당은, 민주당(열린우리당)이 아닌 한나라당(국민의힘)이었다.

 

1819대 총선까지도 민주당 후보의 유세는 여전히 당원·지지자의 막춤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17대 총선에서 충격받은 한나라당(새누리당, 국민의힘)은 아르바이트 학생을 동원한 것인지 아니면 도우미를 고용한 것인지 몰라도, 소위 말하는 쭉쭉 빵빵 여성을 동원해 유권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국 아이디어는 열린우리당(민주당)에서 냈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한나라당(국민의힘)에 완패당한 격이다.

 

이런 문제는 내가 정치를 도우면서 또 선거를 치르면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20111월 한진중공업 85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이 시작되었다.

 

16일 새벽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부 홈페이지에서 김진숙이 고공 농성에 돌입한다는 게시물을 확인했고, 그날 바로 한진중공업 노조를 방문했다. (사실 그날 예전 행자부 장관 시절 영도 지구당 점거 농성을 왔었던 노조원이 아니었더라면, 노조원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김진숙이 85 크레인 고공 농성에 돌입할 거란 조짐은, 진작부터 있었고 노조원 일부는 반대했었다. 그래서 내가 한중 노조 게시판을 매일 훑었던 거다.)

 

아무튼 16일 노조 집행부와 협의하고 이튿날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을 모시고 한진중공업을 방문했다. (대한민국 정치인으로는 처음이고, 김정길과 한진중공업 노조는 인연이 깊다.)

 

사실 당시 내가 한진중공업 노조를 주시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만 해도 김정길 대통령 만들기에 전력투구하던 시기였고, 유한 이미지의 김정길과 노동자를 한 묶음으로 엮어 연대하는 길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을 방문해 노조 간부와 함께 크레인으로 가서 김진숙과 통화한 후, 이후 한진중공업 도로 건너편 인도에

서 노숙도 아닌 노숙을 시작했다.

 

인도에 은박 돗자리를 깔고 김정길 전 장관에게 태블릿 하나만 지니게 하고 혼자 놔둔 채,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그 앞 도로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대기했었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서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그 누구도 김정길만큼 먼저 한진중공업을 찾거나 오랜 기간 노동자와 노숙한 정치인은 없다.

 

단지 그런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을 뿐.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길은 기자에게 촌지주는 일을 아예 하지 않는다.)

 

또한 김정길은 경찰병력이 85크레인을 강제 진압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강제 진압을 선두에 서서 막았다.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경찰의 강제진압을 두려워한 김진숙이 세 차례나 김정길 전 장관에게 s.o.s를 쳤고, 심지어 한 번은 경북 봉화(진영 봉하마을 아님) 모임에 참석하러 갔다가 되돌아온 적이 있다.

 

한 번은 강제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김정길은 직접 부산경찰청으로 쳐들어가, 당시 부산경찰청장이었던 서천호 청장(서천호 청장은, 행자부 장관시절 치안보좌관이었음)으로부터 그 주에는 절대 강제 진압이 없을 것이란 확답을 받기도 했었다.

 

내가 이 글에서 김진숙을 별다른 호칭없이 '김진숙'으로 하는 이유는, 김정길 전 장관이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왔음에도 85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얼마 후 대연동 문화회관 인근 소극장을 찾아온 자리에 김정길 전 장관도 있었고, 김진숙이 그곳에 온 사실을 확인한 내가 직접 김진숙이 앉은 자리로 찾아가 '김정길 전 장관이 앞에 계십니다. 연극이 끝나면 잠시 인사라도 하시지요.'라고 말을 전했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자 무대 앞으로 가서 관객에게 인사말까지 하면서도,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김정길 전 장관에게 인사조차 없이 그 장소를 떠났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김진숙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날 이후 김진숙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희한하게도 나한테 못된 짓한 인간은 뒤끝이 좋지 않다. 위에 언급한 한진중 노숙 중 영감을 끌고와 방해한 놈도, 김정길 전 장관과 내가 감정적 대립이 있은 이후부터 정계은퇴 직전 그 과정에 내 등에 칼을 꽂은 후배도, 그리고 김진숙도... 그래서 예전 김정길 전 장관 부인께서 내게 위의 그놈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권했을 때, 천벌 받았다고 악담을 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김정길을 혼자 내버려 두자, 한진 중공업 노동자도 또 노숙 투쟁에 동참했던 네티즌들이 하나둘씩 김정길 전 장관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일견 성공했다고 속으로 환호하는데, 그런데 다 된 밥에 재 정도가 아니라 똥을 싸는 놈이 생겼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무슨 이유로 벌어졌는지조차 모르는 놈 하나가, 김정길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동네 영감들을 모두 끌고 와서 김정길을 에워싼 것이다.

 

그래서 그놈에게 두 차례 정중하게 부탁했다.

 

눈도장 찍으려는 영감들은 낮에 사무실로 데려가면 되지 않느냐고.

 

내 부탁에도 그놈은 영감들을 매일 같이 몰고 왔고, 결국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은 김정길 말고는 없다는 생각에, 김 전 장관에게 그들을 물리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김 전 장관에게 오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못 오게 하냐?’라는 대답을 들었고, 그 결과 내가 한진중공업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그래서 19대 총선 합류가 늦어졌다. 내가 자기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뻔히 아는 양반이니, 아들에게 전화하게 해서. 그래서 개소식이 끝난 후에 처음으로 선거사무실을 찾았었다. 그리고 처음 계획은 선거와 무관하게, ‘카페 고래를 운영하면서 젊은 친구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면서 말 상대나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카페 고래도 망했다.

 

19대 총선 당시 김정길 캠프의 메인 컬러는 핫핑크였고, ‘카페 고래분위기도 여성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후보와 후보 부인이 자주 찾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선거사무실보다 분위기가 좋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영감·할매가 죽치기 시작한 것이다.

 

테이블마다 눈도장 찍으러 찾아온 영감·할매가 죽치고 있으니, 인터넷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젊은 친구들이 앉을 자리도 없었고 또 영감·할매가 잔뜩 모인 걸 보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테이크아웃 식으로 커피만 받아 들고 나가 버리는 거다.

 

결국 결과는 생돈을 들여, 미친 짓을 한 격이 되었다.

 

심지어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여자를 끼고 와서, 일하는(홍보 작업) 후배들에게 어이~ 커피.’ 어쩌고 하면서 무게를 잡는 미친놈도 한둘이 아니었으니.

 

 

굳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를 늘어놓은 이유는 둘이다.

 

첫 번째는,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은, 대중이 이용하는 공간을 함께 이용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사람은 나이에 따른 놀자리가 따로 있다는 의미다.

 

‘No kids zone’ ‘No senior zone’을 내세우는 업주를 탓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아이가 아무리 별나다고 하더라도, 아이 부모가 아이를 말리면 사고 날 일은 줄어들고, 주변 다른 이에게 피해주는 일 또한 적어진다.

 

내 아이가 권리를 누리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아이 또 주변 다른 사람이 분위기를 즐길 권리도 중요하다.

 

또한 No senior zone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점잖게 커피 한잔 마시고 나가는 걸 두고, 어떤 커피숍 업주가 싫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늙수그레한 늙은이가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온종일 죽치고 있으면, 그걸 누가 지켜보겠는가?

 

지하철이나 버스에 노숙자가 옆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업주는 업주 나름의 고충이 있고, 별나게 설쳐대는 아이나 늙수그레한 영감이 자리에 죽치고 있으면, 그 자체로 영업에 지장을 받는 법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려는 사람이라면, 가게 물건을 다 부수고 다른 손님의 테이블을 엎지르더라도 웃으며 넘기는 그런 곳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사실 우리 나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반기는 커피숍이 많다.

 

내가 이따금 찾는 커피숍 몇 군데도, 분위기가 좋고 젊은 친구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장소에서 우리 나이 사람이 배척받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깔끔한 복장으로 깔끔하게 행동만 하면 된다.

 

○○ 한 잔 주세요.’ ‘고마워요.’ ‘잘 마셨습니다.’

 

이 세 마디면 충분하다.

 

괜히 나이 어린 친구에게 친근한 척한다고 쓸데없는 말을 건네는 순간, ‘꼰대’ ‘주접떠는늙은이로 낙인찍히는 거다.

 

그냥 점잖게 하고, 오래 죽쳐야 할 상황이라면 두 시간쯤마다 커피 한 잔씩만 추가하면, 업주든 아르바이트생이든 절대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이따금 찾는 브랜드 아닌 개인 커피숍 사장 부부는, 내가 오래 죽친다 싶으면 2층까지 조각 케이크를 서비스라면서 갖다주기도 한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콜라텍에 가서 시간을 보내든지 아니면 혼자 공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그리고 덥거나 추울 때는, 지하철이나 은행도 있지 않은가?

 

뭐 한다고 나이 들어 젊은 친구들에게 주접떤다는 소릴 들을 것이며, 꼰대란 소리를 자처하느냐는 말이다.

 

나이에 맞게, 자기가 설 자리를 찾는 것 또한 삶의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